<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셰익스피어


  Gonzo가 제작하고 오이자키 후미토시로가 감독한 애니메이션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만들었다는 점에서, 바즈 루어만 감독의 '과격'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과 대조하게 된다. 일단 영화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한 때문인지 애니메이션 쪽은 훨씬 '얌전'하며 원작을 따라가는 듯이 보인다. 하늘을 나는 용마, 공중 도시 등 환상물과 같은 설정도 있지만, 도시 풍경과 사람들 모습은 실제 서양 도시를 표현하고자 한다(단 일본 문화의 체에 한 번 걸러진, 서양 어디에나 있을 듯 하면서도 어디에도 같은 게 없는, '유사 유럽'의 모습으로 말이다). 얼핏 보면 <빨강 머리 앤>등 '명작극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이야기를 펼쳐나갈수록 셰익스피어의 손을 벗어나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을 바꿨을 때부터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몬타규 대공은 극악해진 대신 원작에는 없던 카리스마와 개성을 갖게 되었다(반면 캐퓰럿 대공은 '의인'의 실속없는 왕관을 얻고,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퇴장해야 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 쥴리엣이 가문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민중의 영웅'으로 싸우기로 하면서 이야기는 또 한 번 방향을 틀었다. 운명 따윈 비웃어 주겠다, 사랑과 굳은 의지만 있으면 어떤 고난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이야기를 지배한다.

 
 이런 희망은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선 찾을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세계는 '운명'이 지배한다. 인간은 한순간도 운명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없다. 한번의 잘못에도 가혹한 대가가 돌아온다. 리어왕이 어리석었다고 하더라도 그 대가는 너무 참혹하다. 의로운 코딜리어는 악한 언니들에게 죽는다. 악한 자들도 결국 파멸하지만, 그건 착한 사람의 징벌 때문이 아니라 내분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나쁜 놈들을 벌하는 후련함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나쁜 놈들은 결국 죽게 되지만 선한 사람들, 죄없는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미쳐버렸다.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도 마찬가지다. 희생 덕분에 평화가 찾아왔다? 희생이 있어서야 반성하는 게 인간이라면, 시간이 지난 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게 뻔하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희극에도 이런 비웃음과 자학을 숨겨 놓았다. 모두 다 '어이없을 정도로' 잘 살게 되는 희극의 엉성한 줄거리는 오히려 현실의 가혹함을 느끼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광대, 냉소하고 불평하는 사람, 미치광이다. 작가의 진정한 뜻을 전하는 건 듣기 좋고 공허한 대사를 쏟아내는 주역들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다.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은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다. 머큐쇼는 캐퓰럿과 싸우는 데 열을 올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독하게 비웃는 사람이다. 그는 행동으로, 인생은 쓸모없으며 의미도 없다는 걸 보여준다. 티볼트의 칼에 죽으면서 머큐쇼는 본심을 (어쩌면 셰익스피어의 본심을) 드러낸다.  '내일 나를 찾아보게, 무덤에서나 만날 수 있을 걸세'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탄식한다. 그리고 '너네 두 집안 다 망해 버려라!'라고 독한 저주(자학일지도 모른다)를 퍼부으며 죽어간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의 머큐쇼는 몬타규 대공의 하수인이나 하는, 피래미 악당일 뿐이다. 반면 티볼트는 애니메이션에서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한다. 원작에선 두 집안의 싸움을 부추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티볼트를 '띄어준' 건 무슨 뜻일까? 애니메이션을 지탱하는 '신념'이란 주제를 강조하려면 티볼트의 확신(또는 맹목)이 필요하다. 머큐쇼의 독설과 자학이 아니다.

 원작을 따라가는 듯하면서 전혀 다른 길로 가는 애니메이션과 견줘보면, 바즈 루어만의 영화는 오히려 원작에 너무나 충실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권총과 현란한 영상을 걷어내면 영화의 주제는 결국 셰익스피어의 것과 같다.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현대판 베로나 젊은이들도, 인간 역사를 언제나 지배해온 운명의 힘은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운명은 극복할 수 있다'는 애니메이션의 신념은 마지막 순간 미심쩍게 뒤틀린다. 줄리엣은 처음부터 '세계수' 에스칼리스를 위해 희생할 운명이었다. 사회와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이 사라진 자리를, 우주의 질서라는 더 크고, 더 거스르기 힘든 '운명'이 대신한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엔딩'인 걸까?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by 쒜비 | 2008/05/19 09:51 | 기타 | 트랙백 | 덧글(0)

서영배 작가의 '무시무종' 시리즈, '미소녀'의 딜레마

'무시무종' 관련 기사 보기(경향신문)
 
 '무시무종' 시리즈는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을 수 없고, 찾아도 저작권 때문에 못 올렸을 것이다. 갤러리 쌈지에서 전시회 한다니 가볼 분들은 가보시고...난 지방에서 사는 팔자나 탓하면서,<ARTRADE>라는 잡지에서 사진 본 걸로 만족해야 했다(그래놓고 '공연, 전시'라고 글을 올리다니, 민망하다) '무시무종'은 애니메이션 피규어를 다완('차 그릇'?), 연적 등 '전통' 소재와 합친 작품이다. 다완에 예쁜 소녀 피규어를 담아놓거나, 여러 개 연적 위에 피규어를 1개씩 다른 자세로('음란한' 자세도 있다) 얹어놓았다. 오타...아니 '달인'이라면 전부 누군지 맞출 수 있으리라. '맞춘다'라는 말을 쓴 이유는 얼굴을 전부 가려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얼굴을 가리니까 인형들이 더 '개성있게' 보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애니메이션과 만화와 게임의 미소녀들, 얼굴이 그게 그거다. 자연스러움 없는 '아름다움'을 향한 일본 문화의 강박관념과, 동인지만 그리고 만화가가 된 사람들 덕분에, 일본의 예쁜 소녀들은 날이 갈수록 예뻐지고, 개성없이 똑같아지고 있다. 몇몇 얼굴형에 몸매와 머리 모양, 옷만 바꾸고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미소녀 게임이나 연애 게임을 즐기신 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요즘에는 얼굴 이외 '장식'조차 갈수록 독창성을 잃고 있다. 작가는 전혀 뜻하지 않았겠지만, '무시무종' 시리즈는 이런 예쁜 소녀 캐릭터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아름다움을 잃을수록, 색깔 없고 모양 없는 공백 뒤에 숨을수록, '자기'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상상력(그래, 우리 남자들의 그 망할 상상력!) 또한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한 요인이다.

by 쒜비 | 2008/05/16 18:08 | 기타 | 트랙백 | 덧글(0)

클레이모어, '강한 여성'의 삶


 영화에서도 애니메이션에서도 '여전사'들이 자주 보인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여전사'들이 활약한 지는 꽤 되었다. 이 세계에도 드디어 성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쉽게 말할 일은 아니다. 성공한 여성들이 늘어난 만큼이나, 아직도 결혼해서 집 안에 눌러 사는 것 말고는 미래가 없는 여성도 많다. 성공한 여성들도 사실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애니메이션 '여전사'들의 괴로운 삶은 '성공한 여성'의 문제와 고민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클레이모어>의 주인공 '클레어'는 여성이면서 <베르세르크> 가츠의 것에 버금가는 큰 칼을 들고 싸운다. 사실 애니메이션에서 '여전사'는 많지만, 그들이 주인공이 된 예는 적다. 보기 좋기 위해선 미소녀나 미녀로 해야겠는데, 가느다른 팔에 큰 칼이나 도끼를 쥐어줄 순 없다. 귀여운 소녀가 바이킹 도끼를 힘 안들이고 휘두르는 건 동인지에나 어울릴 상상력이다. 그래서 여전사 대부분은 채찍, 단검 따위 '우아한' 무기를 택한다. 보기는 좋다. 그러나 맞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면서 '투지'를 보여줘야 할 주인공이 되기는 어려워졌다. 과거의 여전사들은 결국 남자 주인공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에 그쳐야 했다.

 
 최근에 와선 달라지고 있다. 여성들도 큰 칼을 쓰고 도끼를 휘두르며, 남성보다 더한 괴력을 보인다. 주인공도 라이벌도 '최종 보스'도 모두 여성인 건 <클레이모어>가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힘은 남성과 뿌리가 다르다. 클레어는 인간이 아니다. 몸 속에 요마의 힘이 있기에 큰 칼을 휘두르고, 상처를 입어도 회복할 수 있다. 인간일 때 클레어는 연약한 소녀일 뿐이다. 가츠는 그런 딜레마가 없다. 취향이 많이 변했다지만 아직도 강한 근육은 남성의 '아름다움'으로 여겨진다. 남자 전사는 힘과 아름다움 어느 한 쪽도 버릴 필요가 없다. '클레이모어'들은 거친 싸움을 하면서도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싸워야 한다. 힘과 아름다움은 날카롭게 충돌하며 자주 현실성을 갉아먹는다.
 
 더구나 요마의 힘은 제어하지 못하면 금새 폭주한다. 평소의 예쁜 모습은 떠올릴 수 없는 괴물이 된다. 이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헬스 클럽에서 처절하게 단련하면 남성에게도 지지 않을 근육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 대신 당신은 성 매력이라는, 또는 '여성스러움'이라고 불리는 (아직까진) 여성의 최대 '무기'를 잃게 된다. 사실 성 매력도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무기다. 폭주하여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 '클레이모어'의 모습에서 성형수술 부작용, 화장품 중독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요즘 여성들은 이렇게 낮은 수준의 무기로 싸우진 않는다. 그들은 정치인이 되고 교수가 된다. 또는 사업을 하여 부를 일군다. 남성이 사회를 지배한 진정한 '힘'을 손에 넣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다. '남성=힘'이 세상의 질서라는 깨달은 건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힘이 무엇인가?'를 묻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대답을 그대로 따라버렸다. 남성에게 '힘'은 폭력이다. 근력만이 아니라, 돈이든 권력이든, 자신만이 높아지고 남은 짓밟는 것이 '힘'이다. 세계를 삭막하게 만든 것이 남성의 이런 사고방식이다. 여성 역시 '힘'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 콘돌리자 라이스를 보라. 그가 아프리카계 여성이라고 해서, 소수 민족이나 약소국, 또는 그 나라 빈민 여성을 위해 말 한마디라도 해준 적 있는가? 가끔씩 UN의 겉치레 행사에서, 쓸모라곤 미국 쇠고기 대표님의 립 서비스만도 없는 겉치레 말만 몇 마디 지껄일 뿐이다. 어떤 남성보다도 더 잔혹하고 탐욕스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특별히 비뚤어진 건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성공한 여성'이 되려면 악랄해져야 한다. 그 사람의 인격 문제가 아니다. 남성 중심 사회의 뿌리를 파헤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똑같이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그 게임의 규칙 안에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상대가 바라는 규칙대로 싸우는 것, 이미 진 것이다. 
 
 결국 '성공한 여성'이 될수록 남은 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벌일 살벌한 싸움 뿐이다. 클레이모어에게 인생은 두 가지 뿐이다.할 수 있을 때까지 요마를 베어넘길 것인가, 아니면 폭주하여 스스로 요마가 된 뒤, 동료들의 칼에 편안히 죽을 것인가? 성공한 여성도 마찬가지다. 사회와 가정 사이에서 영원히 긴장하고 고뇌하며 살 것인가, 다 집어치우고 가정으로 '돌아가' '안식'을 얻을 것인가?

 
 <클레이모어>의 전사들은 누구보다 강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남성'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일뿐이다. 그들의 두목은 '아버지'의 도덕에 충실하다(그러나 '아버지'는 여러 사람이다. 그들은 '딸'을 공유한다!) '딸'들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면 예뻐하지만, 잠시라도 반항하거나 명령에 의문이라도 품으면, 다른 '딸'들을 시켜 사정없이 숙청한다. 특히 '각성'하는 것은 반드시 숙청해야 할 죄다. 각성은 고통과 함께 엄청난 쾌락을 가져온다. 남성들이 '클레이모어'에 부적합한 건 이 쾌락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훨씬 더 참을 수 있다. '아버지'는 과거 클레이모어였다가 '각성'해 버린 남성은 내버려두지만, '딸'이 각성하면 가만 두지 않는다. 우리 사회 '아버지'들도 아들의 '젊은 날 불장난'은 받아들이지만, 고이 기른 '딸'이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자결'을 명한다(딸을 강간범에게 시집 보내는 것과 같다. 사실상 가정이란 동굴 속에 딸을 가두고 영원히 '죽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 씩 싸울 수 있는 '독립'한 존재 같지만, 사실 클레이모어는 '아버지'의 손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 여성들도 육체의 '아버지'는 벗어났다(아직 그러지 못한 사람도 많지만). 그러나 사회 '지배 윤리'라는 더 큰 아버지, 권력자의 손아귀에선 빠져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힘을 얻기 위해 '아버지'의 품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테레사는 클레어에겐 영웅이고 동경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는 클레어를 마을에 떼어 놓고 가려 한다.'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어라', 테레사의 충고는, 여성이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괴물'이 되는 것 뿐이라는, 그 뒤로는 평생 위태로운 균형 잡기만 남았을 뿐이라는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테레사는 클레어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긴다. 그러나 조직의 규율은 예외가 없다. 사실은 '딸'에게만 예외가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남성보다 갑절은 더 비난과 저주, 엄벌을 견뎌내야 하는 게 '사회인' 여성의 운명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속박에 얽힌 소녀들은 섣불리 이런 '언니'들을 동경한다. 함부로 어른의 세계에 들어서는 대가는 크다. 프리실라는 섣불리 요력을 풀었다가 폭주하여 '각성자'가 되버린다. 최강의 힘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괴물, 같은 여성들도 다가가지 않을 외톨이가 된다. 클레어는 테레사의 바람과는 달리, 복수를 위해 그와 똑같은 길로 들어선다. 물론 클레어는 프리실라같은 바보가 아니며 정말 '강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결말에 이르기까지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가슴이 아픈 일이다.

by 쒜비 | 2008/05/16 09:30 | 기타 | 트랙백 | 덧글(1)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