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23일
한자와 '우리 말 순화' 문제

한자가 '정음'이라 불리며 높은 사람들의 말글을 차지하는 동안, 세종의 야심찬 기획물이었던 '훈민정음'은 '언문', '암클'따위 온갖 '상스러운' 부름말은 다 뒤집어쓰며 따돌림당했다(제정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 말을 '우리 말'로 쓰며, 러시아 말 쓰는 농노들을 '짐승' 취급한 때와 같다). 양반들은 처음부터 한자의 지배를 반겼다. 미군정기 한국 상류층처럼 한자의 정신 점령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이를 이용해 굳건한 권력 토대를 쌓았다. 세종의 개혁은 실패했다. 사실 세종 역시 그저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만든 건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백성을 아낀 임금이었지만, 그들을 위해서 새로운 말글을 만든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중국말 소리를잘 옮겨쓰는 도구'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세종이 원한 것은 중국의 문화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또 하나 목적은 새로운 글자 공부를 강요하여, 한양 양반 관료 세력을 길들이는 것이었다(새 말글이 배우기 쉬운지 어려운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임금이 양반들에게 어떤 새로운 질서를 '강요'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양반들은 똘똘 뭉쳐서 세종의 뜻을 막아냈다(그런 사이에서 애꿎은 최만리만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한글은 몇몇 민망한 임금 찬가만 남긴 채 오랜 세월 묻혀졌다.
오늘날엔 양상이 좀 복잡해졌다. 영어가 한국의 실제 나랏말이 된 지 오래다. 몇몇 글쓴이가 한국어, 한글의 쓰임새를 궁리하고 가르치려 노력하지만 아직은 힘에 부친다. 한자는 좀 묘한 위치에 있다. 몇몇 지식인은 '아시아'를 부르짖으며 한자를 우리의 '전략 무기'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옛날과 지금의 한자 쓰임새는 다르다. '개화기'와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한자 쓰임새가 우리 말에 들어왔다. 번역에 힘쓴 그들의 궁리 덕분에, 서양 사상의 처음 보는 개념을 우리 말로 풀이할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러나 우리 말에 쓸모 없는 찌꺼기도 너무 많이 생겼다. 특히 '-적'은 우리말을 더럽히고, 지식인들을 보통 사람들과 떨어진 '산신령' 내지 '소피스트'로 만들어버린 원흉이었다. 더 아는 게 많고 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이 말을 마구 써댄다. 우리가 정말 존경할 만한 분들도, 유감이지만 대부분 그렇다. 얼마 전부터 이윤기 씨가 옮겨 쓴 움베르토 에코 소설 <전날의 섬>을 읽기 시작했다. 책 내용과 따로, 번역은 최악이었다. 주어와 동사가 안 맞는 문장도 많았고, 역시나 '-적'을 마구 써대니 괴상망측하기까지 한 예도 많았다. 이윤기 씨처럼 정말 '지식인'이라고 부를 사람들도 이러니, 목에 힘이나 주고 알맹이 없는 말만 현란하게 해대는 '교수님'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의 거의 모든 학문이 보통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구름 위에서만 노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형편 없는 번역과 반성 없는 오염된 우리말 쓰임새다. 사실은 영어 낱말 마구쓰기보다 더 나쁜 버릇인데도 반성이 없다).
그러나 한자와 영어가 우리 말을 어지럽혔다고 해서 모두 내칠 수는 없다. 우리 말은 학술 용어, 예술 용어 등을 거의 만들지 못했다. 한자와 영어,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이르기까지 외국어들이 우리 말의 경계를 크게 넓혔다. 어떻게 '순화'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더 주의할 것은 사전에선 비슷한 뜻이어도, 그것이 사회 안에서, 학문 안에서 담고 있는 뜻이 크게 달라져 버린 경우다. 한자 '道'와우리말 '길'이 그런 예다. 오랜 시간 동안 사상가와 종교인이 '道'라는 말에 담은 뜻과 생각은, 이 단어를 '길'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철학의 '부재'라는 말도 '없음'이란 말로 옮겨쓰기 망설여진다. 어려운 학문 세계만이 아니다. <한겨례>에선 농구 용어 리바운드를 '튄공잡기'로, 어시스트를 '도움주기'로 고쳐 쓰고 있다. 전통 문화만큼은 아니어도 이미 상당한 역사를 가진 '농구'라는 운동의 용어가, 쉽게 다른 말로 옮겨 쓸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사전으로 다 나타낼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의 차이는 없는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영어 공용화' 같은 말이야 대꾸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만, 너무 빠르고 성급한 '한글 순화 운동'도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좋은 우리말 쓰기를 배울 수 있는 곳, <오마이뉴스> 최종규 기자님의 가르침 보기
# by | 2008/04/23 13:36 | 책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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