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코>를 보며, 숨이 막힌 진짜 이유

 


 수술비 때문에 손가락 하나를 포기한 사람, 귀가 먹어가는 어린 딸 둔 부모에게 '보험 혜택이 어려우니' 한쪽 귀만 치료하라는 따위 '조언'을 하는 민간 보험 회사, '애국자'라는 립서비스만 실컷 받을 뿐 정작 기관지 질병으로 고생할 땐 아무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한 구조대원까지 모두 다 숨이 막히게 하는 이야기 뿐이다. 처음엔 현실이라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서, 그 다음엔 이와 견주어 나오는, 프랑스, 영국, 캐나다, 쿠바(모두 미국이 깔보거나,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나라다)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듬어진 복지 제도와 의료 혜택 이야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가 미국만의 이야기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대운하 삽질 때문에 걱정할 뿐들이 많을 텐데, 사실 이 쪽은 여론도 있고 하니 정부가 정말 밀어붙이진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건, 이명박이 '대운하'를 포기해 여론에 귀 기울이는 척 하면서, 다른 재벌 편향 정책, 외국 자본 편향 정책을 은근슬쩍 밀어붙이는 '꼼수'를 쓰는 것이다. 특히 민간 자본에 의료 복지를 맡기겠다는 발상이 그렇다. 정말 <식코>에 나오는 미국 사회, 아파도 돈 없으면 치료 받을 수 없고, 보험 가입해도 오히려 병만 더할 것 같은 사회를 만들고 싶은 걸까? 어째서 한국 사회는 이왕 미국 사회를 본뜰 거면 많고 많은 좋은 본은 놔두고, 이렇게 나쁜 본만 안간힘 쓰며 따오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 시민들은 왜 이렇게 조용하고 무기력한 걸까?

 
 영화 속에서 전부는 아니어도, 답 가운데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쿠바 한 가운데 떨어진 마이클 무어와 여러명의 '식코'들은 약간 긴장한다. 그들의 머리 속엔 '쿠바'하면 떠오르는 공포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이 가까이서 본 쿠바는 그저 한가롭고 소박한 나라다. 일행은 쿠바에서 미국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최고의 진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다. 무엇보다 이건 거의 다 공짜다. 맹수처럼 포효하는 카스트로가 다스리는 '악당 국가'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쿠바에서 만난 그 곳 구조대원들은 9.11 때 구조 일을 한 미국 사람들에게 존경의 뜻을 내비친다. 두려워하고 미워한 건 미국이었다.

 이것이 미국의 가장 좋지 못한 점이며, 그들이 세계에 근심과 공포만 안겨 준 원인이다. 미국 사람들은 사실 '바깥 세계'로 나가본 적이 없다. 미국의 돈과 군인은 지금도 세계 어느 곳이든 찔러 대지만, 그들의 마음은 미국 안에, 자기 주 자기 동네 안에서 나온 적이 없다(시골 어른들은 '미국에 없는 건 다른 나라도 없다'라고 하며 외국 여행도 하지 않는다). 편견을 강하게 만든 건 언론이다. 특히 TV가 주된 원흉이었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캐나다의 '싸구려 의료 제도'를 비난하는 미국 정치꾼들을 보라. 그들은 이성보단 감정이 기세를 떨치는 TV를 통해서, 자신들의 논리 같지도 않은 논리, '국가 의료 보험은 사회주의'라는 논리를 사람들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솔직히 말하자면, 서민에게 실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정책이라면, 그게 사회주의 국가가 하던 정책이면 또 어떤가? 좋은 거면 무엇이나 받아들이는 게 요즘 인기라는 '실용주의' 아닌가?). 처음부터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식도 예절도 없는 미국 사람들의 편견과 이유 없는 외국인 증오(요즘 표적이 중국으로 옮겨 가는 느낌이다)를 TV가 더욱 굳게 만들었다(이젠 좀 때가 늦은 지적 같지만, 우리가 미국 따라 TV채널을 수백 개까지 늘린 건 잘못이었다. TV도 현대 문화의 한 갈래로 나름 좋은 일도 한 건 있겠지만, 나쁜 일을 더 많이 했다. 무엇보다 TV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TV에 사로잡힌 미국 시민들의 모습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야 했다). 

 
 불행히도 현대 한국은 미국과 닮았다. 한국의 시작이 남한 VS 북한이라는, 어떤 관용도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는 처절한 싸움에서 시작했다. 그 뒤로는 두 사회 모두, 진짜 '세계'에 닿을 길이 끊어져버렸다. 북한은 정책부터 외톨이를 추구했다. 남한도 다른 나라와 주고받은 것은 상품 뿐이었다. 사람도 일단 외국으로 나가긴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결국 외화를 벌어오거나, '외국 물'의 힘으로 남한 안에서 높은 자리를 얻고 싶어할 뿐이다(유학생, 사업가, 건설 노동자 등). 진정 바깥 세계와의 나눔을 원한 사람은 매우 적다. 그와 반대로, 상품을 파는 것, '대한민국'이란 '브랜드'를 팔려는 욕심은 매우 크다.

 우리는 바깥 세계를 거의 알지 못한다. 이 점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지식'은 그저 미국 영화와 TV 드라마, 또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들렀다 갈 뿐인 몇몇 '외국 손님'의 입바린 이야기에서 걸러낸 이미지 뿐이다. 특히 TV의 해악은 우리 나라에서도 크다. 외국인까지 '미녀'만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미수다'는 결국 외국을 보는 눈을 더 삐뚤어지게 하는 '나쁜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미국이 오만함 때문에 다른 나라와 사귈 생각을 안 했다면,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개화기'에는 '선진 지식' 때문에, '해방'후엔 '우리 정부' 인정받으려고, 그 후엔 '외화'와 '국가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외국과 만나고 외국말을 배우고 외국 문화에 관심 있는 척 하면서 살아왔다. 지금 이명박(정말이지, '대통령'이란 부름말은 죽어도 붙이기 싫다!)이 '의료 제도 민영화'라는 위험한 생각을 밀어붙이는데도 큰 시위 한 번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말 모범으로 봐야 할 다른 사회를 알지 못하고, 정부와 재벌 비위 맞추는 언론, 특히 TV가 쏟아붓는 이미지 공격에 시민들의 이성과 마음이 완전히 무장 해제 당한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당한 뒤에야 후회하게 되는 걸까?
  

by 쒜비 | 2008/04/12 16:40 | 영화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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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판타지피아 at 2008/04/14 10:32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한곳으로 쏠려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저번 대통령 선거(한국 사상 투표율이 최저였다고 하더군요.)를 시작으로 말이죠.
'조 사코'씨의 만화 <팔레스타인>과 <안전지대 고라즈데>를 추천해드리고싶네요. 적어도 한국이 이정도 안된다는 것에 감사하고 아직도 이런 나라가 있다는 현실에 담배를 피게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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