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10일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 보고나서, 주저리.
1. 해바라기 그림도 <별이 빛나는 밤에>도 없었고, 자화상은 1점 밖에 없었다.
책에서 본 뒤 실제로 보길 고대했던 많은 그림들을 이번 전시회에서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정말 아쉬웠다.
물론 이 정도 수의 그림을 가져온 것만도 주최 측의 노력을 칭찬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아쉬웠다.
무엇보다 개신교 체육관 집회에 버금가는
(만약 정말로 체육관에서 더 많은 그림을
놓고 전시회를 했다면 정말 수만명이 모였을지도 모른다. 피카소나 다빈치도
가질 수 없는 고흐라는 화가만의 힘이다)
인파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하느라 그림을 천천히 보며 느낄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2. 즉 고흐의 그림은 이제 모두가 즐기는 하나의 '키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고흐의 그림은 원래 지식인들이 좋아할 것이 아니었다.
고흐는 다빈치나 뒤러처럼 뭔가 심오한 듯한 메시지를 그림 안에
숨기지도 않았고
(혹시 어떤 상상력 풍부한 소설가가 이미 <빈센트코드>를 구상했지도 모르겠지만)
피카소나 워홀처럼
애매모호한 말로 비평가들의 '혼자 수수께끼 만들고 풀며 즐거워하는 취향'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놀이를 '지적 호기심'이란 매끈한 포장으로 휘둘러싼다)
을 만족시키는 애매모호한 표현도 즐기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고, 고지식한 표현만 고수했다.
물론 나 같은 대중이 이해하기에는 이 쪽이 더 쉽고, 정서에도 강하게 호소하니,
어쩌면 이런 '키치'화가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어떤 작가든 자신의 '오오라'안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일부 비평가들,
미술 애호가인 척 하면서 돈질이나 싸지르는 졸부들, 장물아비에 불과한 주제에
거드름 피우는 소더비, 크리스티 경매장
(내 일관된 생각은 예술품의 경매와 개인 소장은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노동자 화가'고흐를 멋대로 주물럭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본 뒤 실제로 보길 고대했던 많은 그림들을 이번 전시회에서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정말 아쉬웠다.
물론 이 정도 수의 그림을 가져온 것만도 주최 측의 노력을 칭찬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아쉬웠다.
무엇보다 개신교 체육관 집회에 버금가는
(만약 정말로 체육관에서 더 많은 그림을
놓고 전시회를 했다면 정말 수만명이 모였을지도 모른다. 피카소나 다빈치도
가질 수 없는 고흐라는 화가만의 힘이다)
인파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하느라 그림을 천천히 보며 느낄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2. 즉 고흐의 그림은 이제 모두가 즐기는 하나의 '키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고흐의 그림은 원래 지식인들이 좋아할 것이 아니었다.
고흐는 다빈치나 뒤러처럼 뭔가 심오한 듯한 메시지를 그림 안에
숨기지도 않았고
(혹시 어떤 상상력 풍부한 소설가가 이미 <빈센트코드>를 구상했지도 모르겠지만)
피카소나 워홀처럼
애매모호한 말로 비평가들의 '혼자 수수께끼 만들고 풀며 즐거워하는 취향'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놀이를 '지적 호기심'이란 매끈한 포장으로 휘둘러싼다)
을 만족시키는 애매모호한 표현도 즐기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고, 고지식한 표현만 고수했다.
물론 나 같은 대중이 이해하기에는 이 쪽이 더 쉽고, 정서에도 강하게 호소하니,
어쩌면 이런 '키치'화가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어떤 작가든 자신의 '오오라'안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일부 비평가들,
미술 애호가인 척 하면서 돈질이나 싸지르는 졸부들, 장물아비에 불과한 주제에
거드름 피우는 소더비, 크리스티 경매장
(내 일관된 생각은 예술품의 경매와 개인 소장은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노동자 화가'고흐를 멋대로 주물럭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른다.
# by | 2008/02/10 09:51 | 명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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