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1월 25일
뒤집힌 '시간' , 공상 속의 '결승점'
텔레비젼에 나온 배철수를 보고 한 꼬마가 외쳤다는 이야기: 와, 저 아저씨 배칠수 아저씨 흉내 정말 잘 낸다!("너희 아빠는 정말 널 닮았구나")
편한 소파에 가로누워, 텔레비젼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흘러나오는 수백개 채널을 과자와 맥주를 곁들어 감상하면서 우리는 무심코 이런 말을 한다. '옛날 사람들'은 텔레비젼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꼬, 하며, 그들이 겪뎌 내었어야 할 엄청난 '지루함'을 동정하기까지 한다.
사실 우리가 과거를 보는 눈이 이렇다. 원래 앞의 것이 있고 난 후 그를 기반삼아 뒤의 것이 있는 법.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는 이 관계가 뒤집어져 버린다. 위의 꼬마야 연예 문화사에 대한 지식이 아직 부족한 때문이고 나름 귀엽기라도 하지만, 다 큰 어른들의 무의식에도 이런 식의 판단 메카니즘이 작동한다. 뒤의 것, 나중 시대의 것으로 이전 시대의 것을 판단해 버린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결핍'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즉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전제, 인간은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거라는 독선. 그러나 텔레비젼이라는 물건이 애당초 없었던 조선인, 고려인들이 '텔레비젼이 없어서 지루하다'는 식의 관념을 가질 리가 없다. 그리고 텔레비젼 역시 역사의 흐름에 다른 '꼬임'이 생겼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물건이다. 숱한 우연이 교차되어 나온 역사적 사건일 뿐이다. 배칠수도 인생 어느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연예인이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이나 선생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럼 배철수나 노무현의 말투를 흉내내며 살았을 리도 없다. 우리 눈 앞에 있는 결과물들은 이렇게 무수한 우연과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다. '반드시' 존재해야 할 '역사적 필연'이란 것은 허구일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연인들이 속삭인다. '널 만나기 전에 난 어떻게 살았던 걸까?' 어떻게 살긴. 수십 년 동안 잘 살았지 않았는가.
텔레비젼이나 연예인 정도는 귀여운 무지로 봐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뒤집힌 의식이 역사와 세계까지 마음대로 재단해 버릴 때 생긴다. 바로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명품에 불과한 민주주의, 자본주의와 몇 가지 신기한 (하지만 대부분 못된 짓에 악용되는) 기술을, 자신들이 인류의 '진보'의 정점에 이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류의 시작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모든 인간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진보'라는 신화를 만들었고 이런 관점에서 역사 자체를 조작했다. 원래의 인류는 ('현대'의 관점에서) 무지몽매하지만, 그들에겐 제대로 된 방법(바로 서구의 방법)을 써서 노력하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필연적인' 지점이 있다. 그 곳에 먼저 도달한 자가 제일 우수하고(바로 자신들), 도달하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보다 '열등'하다. 고로 우리 '문명세계'는 '후진국'들이 결승점에 도달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렇게 그들은 전세계가 자신들의 종교를 믿게 하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공부하게 하고, 자신들의 말을 쓰게 한다. 그럼으로써 한낱 공상에 불과했던 '역사의 진보'를 현실화해버린다(사실은 유럽인 마르크스도 이런 사고 방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있지도 않았던 결승선이 이제는 너무나 분명하게 그려지고, 모든 세계 '형제'들은 오늘도 내일도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물론 결승선에 언제나 제일 가까운 것은 미국과 몇몇 유럽 국가(그리고 여러 차례의 기막힌 좋은 우연으로 선두권에 끼여든 중국과 일본) 정도다. 에티오피아가, 말레이시아가, 페루가 선두권에 설 일은 이 지구가 파멸하는 날까지 오지 않는다. 한국도 물론 마찬가지다(한국은 그나마 중간 그룹에선 운이 좋은 편이지만).
이 비극의 진정한 해결책은 저들 몇몇 강대국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저들이 마음대로 그어놓은 결승선 따위는 거부하고 각자 마음에 드는 길로, 걸어가든 뛰어가든 흩어져 버리는 것, 그래서 남의 일에 참견 말고 각자 자기들 방식대로 잘 먹고 잘 사는 것 뿐이다. 하지만 당분간 이는 어려워 보인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새로운 유령이 지구 대기권을 덮은 이상. 그리고 항상 심판이 10발짝은 앞에 세워준 덕분에 국내 달리기 대회마다 1위를 했던 모 양반이 새로운 추장이 된 이상,한국 역시 앞으로도 한참은 더 뛰어야 할것 같다.
# by | 2008/01/25 15:04 | 기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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